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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디트리히 겐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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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서독 및 통일 독일의 외무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69년 빌리 브란트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1980년대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와 독일 재통일에 기여했다. 겐셔는 동방 정책을 추진하고, 유럽 통합과 유럽 연합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1990년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에 서명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하기도 했으며, 정계 은퇴 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201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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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디트리히 겐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겐셔 (1978년)
겐셔 (1978년)
서명
직책
독일 연방 부총리헬무트 콜 총리 하
임기 시작1982년 10월 1일
임기 종료1992년 5월 17일
독일 연방 부총리헬무트 슈미트 총리 하
임기 시작1974년 5월 17일
임기 종료1982년 9월 17일
연방 외무부 장관헬무트 콜 총리 하
임기 시작1982년 10월 1일
임기 종료1992년 5월 17일
후임클라우스 킨켈
연방 외무부 장관헬무트 슈미트 총리 하
임기 시작1974년 5월 17일
임기 종료1982년 9월 17일
후임헬무트 슈미트
임기 시작1974년 10월 1일
임기 종료1985년 2월 23일
후임마르틴 방게만
임기 시작1969년 10월 22일
임기 종료1974년 5월 16일
총리빌리 브란트
후임베르너 마이호퍼
임기 시작1965년 9월 19일
임기 종료1998년 10월 26일
선거구FDP 목록
개인 정보
출생1927년 3월 21일, 라이데부르크, 프로이센, 독일
사망2016년 3월 31일 (89세), 바흐트베르크, 독일
정당자유민주당 (1952–2016)
과거 소속 정당나치당 (1945년까지)
독일 자유민주당 (동독) (1946–1952)
배우자루이제 슈바이처 (1958년 결혼, 1966년 이혼)
바르바라 겐셔 (1969년 결혼)
모교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Staatsexamen)
직업정치인
웹사이트genscher.de

2. 어린 시절

1927년 3월 21일, 현재 독일 작센안할트주 할레에 속하는 라이데부르크에서 중류 집안에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으나, 겐셔가 9살 때 사망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고,[8] 1943년에는 16세의 나이로 공군 지원 인력(Luftwaffenhelfer)으로 징집되었다. 17세가 되던 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그는 그의 국방군(Wehrmacht) 부대의 단체 신청(Sammelantrag)으로 인해 나치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6]

전쟁 후반기에 겐셔는 베를린 포위를 해제하기 위해 파견된 발터 벤크 장군의 제12군에 병사로 배치되었다. 독일 항복 후 그는 미군과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두 달 만에 석방되었다.[7]

종전 후 겐셔는 건축 보조 작업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프리드리히 니체 고등학교를 다녔고, 1946년 아비투어 시험에 합격했다. 같은 해 할레 대학교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경제학을 공부했으며(1946~1949),[8] 1949년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1946년 동독의 자유민주당(LDPD)에 입당했다.[8]

1952년 서베를린을 경유하여 서독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할레 지방 법원의 수습 판사로 일했다.

3. 정치 경력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1952년 서독으로 망명한 후 자유민주당(FDP)에 입당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5] 1965년 독일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1998년 은퇴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9]

1968년 자유민주당 부의장이 되었고,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PD)과의 연립 정부에서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5] 1974년 발터 셸 대통령 선출 후, 외무장관 겸 부총리가 되어 18년간 이 직책을 수행했다.[5] 1974년부터 1985년까지는 자유민주당 당수를 역임했다. 겐셔는 외무장관으로서 데탕트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15]

1982년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대한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주도,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연합(CSU)과의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헬무트 콜 총리 하에서 외무장관 겸 부총리직을 이어갔다.[18]

겐셔는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에 기여했으며, 1980년대 중반 단일 유럽 법 조약 협상에 참여하는 등 유럽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3. 1. 내무장관 시절

1969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 이후 겐셔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회자유 연정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69년 10월 22일 연방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2]

1972년 내무장관 재직 당시 겐셔는 뮌헨 올림픽 인질극 사태 해결을 위해 이스라엘 특수부대를 독일로 파견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스라엘 선수들이 석방되는 조건으로 자신을 인질로 제공했지만, 테러 단체 지도자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12] 퓌어스텐펠트브룩 공군기지에서 독일 경찰이 시도한 부실한 구출 작전은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으로 이어져 인질 11명, 테러범 5명, 독일 경찰 1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테러 특수부대 GSG-9이 창설되었다. 겐셔는 브란트 총리에게 사임을 제안했지만 브란트는 이를 거절했다.[12] 1972년 10월 29일 루프트한자 615편 납치 사건 이후 체포된 세 명의 공격자 석방을 지지하면서 겐셔의 이스라엘 내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5][13]

3. 2. 외무장관 시절

겐셔는 1974년 서독 외무부 장관이 된 이후, 주요 권력 국가들의 외무장관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인물 중 하나였다.[5] 그는 동서 간의 타협 정책을 지지했으며, 적극적인 데탕트 정책과 소련과의 동서 대화 지속을 위한 전략을 개발했다.[15] 겐셔는 국제 문제에 대한 협상된 해결책을 강력히 옹호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15]

헬싱키 협정 문구 협상에서 주요 인물이었던 겐셔는,[17] 1976년 12월 뉴욕시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테러 방지 협약 채택을 주도했다.[17] 이 협약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질범들의 요구에 대응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1982년 겐셔는 SPD과의 연정에서 이탈하여 CDU/CSU를 지지, 헬무트 콜을 총리로 추대하는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주도했다. 이는 경제 및 사회 정책에서 연정 파트너 간의 차이가 커졌기 때문이었다.[18] 이러한 전환은 특히 그의 당 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18]

겐셔는 독일 내 새로운 단거리 NATO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하여 '겐셔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0] '겐셔주의'는 독일이 NATO 동맹국의 지위를 잃지 않고 동서 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15]

1984년 겐셔는 이란 혁명 이후 테헤란을 방문한 최초의 서방 외무장관이 되었다.[21]

겐셔는 1980년대 후반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와 독일 재통일로 이어진 냉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20] 그는 서방과 소련 블록 간의 안정과 균형 유지를 중점적으로 추진했으며, 서방이 공산 정권을 적대시하기보다는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

1989년 9월 겐셔는 뉴욕 유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동독, 소련 외무장관들과 난민 위기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26] 같은 해 9월 30일 프라하 독일 대사관 발코니에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오늘 여러분의 출국을 알리려고 왔습니다..."라는 연설로,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난민들의 출국 합의를 발표했다.[27]

겐셔는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소련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과 함께 독일의 평화적인 통일과 소련군 철수를 확보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28] 1990년 9월 12일 서독을 대표하여 독일 문제에 관한 최종 조정 조약에 서명했으며,[30] 같은 해 11월 크시슈토프 스쿠비셰프스키 폴란드 외무장관과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의 서부 국경으로 설정하는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에 서명했다.[31]

3. 3.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1991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을 때, 겐셔는 유럽 공동체(EC) 내 합의 없이 이들 국가의 독립을 지지하고 승인했다.[32] 그는 유고슬라비아가 유지될 수 없으며, 세르비아가 지배하는 연방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하는 공화국들은 신속한 외교적 승인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론지었다.[20] 그는 그러한 승인이 전투를 멈추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20]

독일의 이러한 결정은 다른 유럽 공동체 회원국, 영국, 미국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루어졌으며, 유고슬라비아 붕괴의 계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79] 유엔 사무총장 하비에르 페레스 데 쿠엘리아르는 독일 정부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승인이 전 유고슬라비아에서 공격성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32] 프랑크 움바흐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대응에 대해 겐셔와 EC 회원국들을 비판하며, 유고연방은 유럽 통합의 이상 실현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고 말했다.[79]

3. 4. 독일 재통일

1980년대 후반 동유럽에서 공산 정권 붕괴와 독일 재통일로 이어진 냉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겐셔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서방과 소련 블록 간의 안정과 균형 유지를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처음부터 서방이 공산 정권을 완고하게 적대시하기보다는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정책은 많은 독일인과 유럽인들의 지지를 받았다.[20]

겐셔는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 성공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곧 폴란드헝가리의 정치 개혁 과정에 대한 효과적인 지원을 추진했다. 특히 1987년부터 그는 서방의 소련 노력에 대한 "적극적인 완화" 정책 대응을 옹호했다.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이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서독 대사관에 피난을 요청하자, 겐셔는 1989년 9월 뉴욕 유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동독, 소련 외무장관들과 난민 위기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26] 겐셔가 1989년 9월 30일 프라하 독일 대사관 발코니에서 한 연설은 동독 종식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대사관 안뜰에는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독으로 여행하려 했지만, 동독의 요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여행 허가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난민들이 떠날 수 있다는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Wir sind zu Ihnen gekommen, um Ihnen mitzuteilen, dass heute Ihre Ausreise ...|우리는 여러분에게 오늘 여러분의 출국을 알리려고 왔습니다...de 이 말 이후 그의 연설은 환호성에 묻혔다.[27]

겐셔는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와 소련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과 함께 독일의 평화적인 통일과 소련군 철수를 확보한 공로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28] 그는 1990년 동독의 마르쿠스 메켈과 함께 독일 재통일 협상을 벌였다.[29] 1990년 9월 12일 그는 서독을 대표하여 독일 문제에 관한 최종 조정 조약에 서명했다.[30] 1990년 11월 겐셔와 폴란드의 크시슈토프 스쿠비셰프스키 외무장관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의 서부 국경으로 설정하는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에 서명했다.

4. 정계 은퇴 이후

1998년 연방의회에 입후보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기업 및 국제 관계 분야에서 활약했다. 2000년에는 한스-디트리히 겐셔 컨설팅(Hans-Dietrich Genscher Consult)사를 설립했다.[80]

2013년 12월 20일, 겐셔가 전 유코스 회장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의 석방과 독일로의 탈출을 조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겐셔는 2002년에 처음 호도르코프스키를 만났고, 호도르코프스키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그의 석유 회사에 대한 추격을 비난한 회의를 주재했다.[49] 호도르코프스키는 2011년 감옥 방문 중 변호사들에게 겐셔가 조기 석방 중재를 돕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2012년 푸틴이 재선된 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관리들에게 푸틴 대통령과 겐셔의 면담을 위한 로비를 지시했다.[49][50] 그 후의 협상에는 겐셔와 푸틴 간의 두 차례 면담이 포함되었는데, 한 번은 2012년 재선 후 푸틴의 독일 첫 방문 후 베를린 테겔 공항에서, 다른 한 번은 모스크바에서였다. 총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호도르코프스키의 변호사와 겐셔는 그 후 몇 달 동안 기존 법률 개정부터 사면에 이르기까지 푸틴이 그의 전 라이벌을 조기에 석방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법적 방안을 개발했다.[49] 2013년 11월 호도르코프스키의 어머니가 베를린 병원에서 암으로 투병 중일 때, 겐셔는 호도르코프스키에게 어머니의 건강 악화를 강조하며 푸틴에게 사면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51] 2013년 12월 푸틴이 "인도주의적 이유"로 호도르코프스키를 사면한 후, 겐셔가 제공한 전용기가 호도르코프스키를 베를린 호텔 아들론으로 데려와 가족과 재회하게 했다.[52]

2016년 3월 31일 근교 바흐트베르크(Wachtberg)에 있는 자택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55][56][80]

5. 한국과의 관계

겐셔는 서독 외무장관 시절 대한민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1980년대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는데, 1988년폴란드레흐 바웬사 연대 의장과 회담하여 폴란드 민주화 운동을 지원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6. 평가 및 유산

겐셔는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 유럽 통합에 기여한 20세기 후반의 주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실용주의적 외교 정책은 '겐셔주의'라는 용어로 불리며, 국제 정치에서 중재와 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델로 여겨진다.[15] 겐셔는 동서 간의 타협 정책을 지지했으며, 적극적인 데탕트 정책과 소련과의 동서 대화 지속을 위한 전략을 개발했다. 그는 국제 문제에 대한 협상된 해결책의 강력한 옹호자로 널리 여겨졌다.[15] 겐셔가 선호하는 셔틀 외교 방식에 대한 유명한 일화는 "두 대의 루프트한자 제트기가 대서양을 횡단했고, 겐셔는 두 비행기에 모두 탑승해 있었다"는 것이다.[16]

헬싱키 협정 문구 협상에서 주요 인물이었으며,[17] 1976년 12월 유엔 총회는 겐셔가 제안한 테러방지 협약을 승인했다.[17]

1980년대 겐셔는 독일 내 새로운 단거리 NATO 미사일 배치에 반대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독일이 서방 동맹에서 벗어나 자체 프로그램을 따르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20] 겐셔의 인식된 준중립주의는 "겐셔주의"라고 불렸다.[15] "겐셔주의"의 근본에는 독일이 신뢰할 수 있는 NATO 동맹국의 지위를 잃지 않고 동서 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15]

그의 제안은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외교 정책의 방향과 기조를 자주 설정했다.[19] 그는 또한 유럽 연합의 추가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80년대 중반 단일 유럽 법 조약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탈리아 외무장관 에밀리오 콜롬보와 함께 유럽 연합 내 관계의 추가 통합과 심화를 촉구하는 겐셔-콜롬보 계획을 공동 발표하여 보다 연방 유럽으로 나아가는 것을 옹호했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 재무장관 에두아르 발라뒤르줄리아노 아마토와 함께 통화 연합을 강력히 추진한 정치인 중 한 명이었으며,[22] 이에 대한 각서를 배포했다.[23]

7. 수상 내역

연도훈장 및 수상 내역
1973년, 1975년독일연방공화국 공훈훈장[44][72]
1986년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44]
1987년포르투갈 공훈훈장 그랑크루아
1990년아스투리아스 공주상[73]
1992년폴란드 공화국 공훈훈장[44]
1992년헝가리 공화국 공훈훈장[44]
1996년두크 트르피미르 훈장 (크로아티아)[74]
1998년트빌리시 주립대학교 명예박사 학위[75]
2002년슈체친 대학교 명예박사 학위[44]
2003년라이프치히 대학교 명예박사 학위[44]
2004년에리히 케스트너 상[44]
2006년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평화상[44]
2007년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공훈훈장
2008년발터 라테나우 상[44]
2010년작센안할트 공훈훈장[76]
2010년밀레니엄 밤비상[44]
2015년미국 베를린 아카데미 헨리 A. 키신저 상 (조르조 나폴리타노와 공동 수상)[77]
2015년독일 국가 지속가능성 상
2020년마르쿠스 메켈, 이반 하벨(Ivan M. Havel), 이반 크바틱([https://www.memoryofnations.eu/en/chvatik-ivan-1941 Ivan Chvatik])과 함께 제20회 한노 R. 엘렌보겐 시민상 수상 (철의 장막 붕괴 30주년 기념, 프라하 국제협력협회와 글로벌 패널 재단([:de:Global Panel Foundation]) 공동 수여)


참조

[1] 뉴스 A master of diplomacy http://www.dw.com/en[...]
[2] 웹사이트 Hans-Dietrich Genscher, an Architect of German Reunification, Dies at 89 https://www.nytimes.[...] 2016-04-01
[3] 뉴스 Recognizing Slovenia, Croatia brought peace, Genscher says http://www.dw.com/en[...]
[4] 서적 The International Who's Who 2004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5] 뉴스 Zum Tod von Hans-Dietrich Genscher: Marathonmann der deutschen Politik http://www.spiegel.d[...] 2016-04-01
[6] 뉴스 Zeitgeschichte: Von Grass bis Genscher – Wer noch in der NSDAP war https://www.welt.de/[...] 2007-07-01
[7] 간행물 Darmstädter Echo Ulrich Herbert, Universität Freiburg 2015-06-13
[8] 서적 A Dictionary of Political Biography https://web.archive.[...] OUP 2013-09-01
[9] 웹사이트 Bundestag trauert um Hans-Dietrich Genscher http://www.bundestag[...] Deutscher Bundestag 2016-04-01
[10] 뉴스 Der "Mister Mitte" der Republik http://www.zeit.de/1[...] 1992-05-01
[11] 뉴스 Porträt: Jahrzehnte prägte Genscher die deutsche Politik http://www.zeit.de/n[...] 2016-04-01
[12] 웹사이트 Die Rolle von Hans-Dietrich Genscher https://www.daserste[...] 2024-07-16
[13] 웹사이트 1972 Olympics Massacre: Germany's Secret Contacts to Palestinian Terrorists http://www.spiegel.d[...] 2012-08-28
[14] 뉴스 Coalition uncertainty hangs over Angela Merkel victory http://www.ft.com/in[...] 2013-09-22
[15] 뉴스 Genscher At Eye of Policy Debate https://www.nytimes.[...] 1991-03-22
[16] 뉴스 Bonn's Genscher Views Gorbachev Reforms as 'Historic Opportunity' https://www.latimes.[...] 1989-06-11
[17] 문서 Drafting of an international convention against taking hostages http://daccess-dds-n[...]
[18] 웹사이트 Hans-Dietrich Genscher: Ein Leben in Bildern https://www.tagessch[...] Tagesschau 2016-04-01
[19] 뉴스 Genscher Quits as Germany's Foreign Minister https://www.latimes.[...] 1992-04-28
[20] 뉴스 Genscher, Bonn's Foreign Minister 18 Years, Resigns https://www.nytimes.[...] 1992-04-28
[21] 뉴스 Bonn Names Libya Envoy https://www.latimes.[...] 1988-10-01
[22] 뉴스 The blueprint for lopsided monetary union http://www.ft.com/in[...] 2012-12-16
[23] 문서 Memorandum für die Schaffung eines europäischen Währungsraumes und einer Europäischen Zentralbank http://moneyingreece[...] 1988-02-26
[24] 뉴스 Hans-Dietrich Genscher mit 89 Jahren gestorben https://www.welt.de/[...] 2016-04-01
[25] 뉴스 Bonn's Genscher Views Gorbachev Reforms as 'Historic Opportunity' https://www.latimes.[...] 1989-06-11
[26] 뉴스 E. Germans Win Bid to Go to West : Prague, Warsaw Permit 4,000 in Embassies to Leave https://www.latimes.[...] 1989-10-01
[27] 웹사이트 Former German Foreign Minister Hans-Dietrich Genscher dies https://www.bbc.com/[...] BBC 201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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